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문단 편집) ==== [[카를 5세]]와의 대립 ==== 비록 크리스티안 3세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통치권을 확립하고 종교개혁도 성공시켰지만 여전히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위협에 시달렸다. 카를 5세는 폐위된 크리스티안 2세의 처남으로서 크리스티안 2세의 딸들의 권리를 통해서 크리스티안 3세의 덴마크 왕위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크리스티안 3세는 외교적으로 카를 5세를 압박하기 위해서 카를 5세와 맞서고 있던 독일 내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연합을 도모했다. 그리고 본래 크리스티안 2세가 스칸디나비아의 3개국 왕위를 모두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딸들이 덴마크 뿐만 아니라 스웨덴 왕위도 요구하고 있는 점을 이용하여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 바사와 AD 1541년 브룀세브루 조약을 체결하고 카를 5세의 해상 공격에 공동 대응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크리스티안 3세가 백작 전쟁에서 독일 용병을 고용하기 위해서 독일 귀족들에게 막대한 부채를 지니게 되었는데 이것도 역시 많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 때문에 크리스티안 3세는 덴마크의 귀족 및 대영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노력했고 이것이 결실을 얻어서 AD 1542년 코펜하겐 의회에서 덴마크 귀족들의 수입 중 20분의 1을 제공받기로 결의하는 데 성공했다. 이 덕분에 크리스티안 3세는 독일에 대해 지니고 있던 모든 부채를 청산하게 된다. 그러자 여유가 생긴 크리스티안 3세가 이제 카를 5세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다. 비록 크리스티안 3세가 시도한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의 연합은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해상에서는 외레순 해협을 봉쇄하는 방법으로 카를 5세에게 타격을 줄 수 있었다. 당시 카를 5세의 영지이기도 한 네덜란드의 상선이 북해와 발트해를 연결하는 교역에 종사하면서 많은 수입을 얻고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합스부르크 네덜란드]]에서 카를 5세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카를 5세 역시 네덜란드에게 재정의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방치할 수만은 없었다. 결국 AD 1544년 크리스티안 3세와 카를 5세는 서로 슈파이어 조약을 체결하고 네덜란드 상선의 출입을 다시 허용하는 대신에 크리스티안 3세의 덴마크 왕위가 공인받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이렇게 크리스티안 3세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고 스웨덴과의 브룀세브루 조약과 카를 5세와의 슈파이어 조약을 통해서 주변과의 외교 관계도 우호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이상의 전쟁은 피했다. 이에 따라 AD 1546년 독일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의 연합체인 슈말칼덴 동맹과 카를 5세 간에 전쟁이 발발한 뒤에도 개입하지 않았고 AD 1552년 다시 반란을 일으킨 작센 선제후 [[모리츠(작센)|모리츠]]가 AD 1553년 지버스하우젠 전투에서 전사하자 [[독일왕]] [[페르디난트 1세]]와 [[작센 선제후국]] 간의 중재를 맡기도 했다. 이후 독일에서는 AD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서 루터교가 공인받게 되었고 이로서 덴마크가 종교 문제 때문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공격을 받을 일도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